청춘에게 고함 12 by 개꽃

12. 나만 모르는 이야기






 박유천은 이제 더 이상 나를 피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박유천이 나를 피한 것이라고 느낀 것뿐이지 실제로 박유천이 나를 피한 것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박유천이 내게 '주제 파악'을 하라던 그 날 부터, 박유천은 싸운 이후 먹지 않던 아침밥을 먹기 시작했다. 박유천의 얼굴을 마주보며 밥을 먹어야하는 아침 시간은 내게 정말로 곤욕스러운 시간이었다. 박유천은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나 혼자 박유천의 눈치를 보며 밥을 먹었다. 그러다 결국 밥을 먹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박유천과 함께 하던 등교도 이제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박유천은 밥을 먹고 먼저 학교에 가버리고 나는 정윤호와 윤주와 함께 등교를 했다. 요즘에는 윤주가 선도 활동을 한다고 우리보다 훨씬 일찍 등교하는 바람에 나와 정윤호 단 둘이 등교를 한다. 원래 말이 많이 없는 정윤호지만, 요즘들어 내가 계속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으니 정윤호가 자꾸 말을 건다. 말주변이 없는 정윤호라 무슨 말을 해도 툭, 툭, 끊기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계속 말을 하려는 정윤호의 노력이 가끔씩 가상하기도 하다.

 오늘 등교길 정윤호의 대화 주제는 수학 여행이였다. 아…, 그러고보니 수학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학 여행에 대한 기대가 참 컸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느낌도 감흥도 없다. 정윤호는 꽤 들떴는지 신이 난 목소리다. 뭐, 평소 목소리와 별반 차이는 없지만 나는 안다. 지금 정윤호가 꽤 신난 목소리라는 것을.


 "수학 여행 진짜 얼마 안남았다. 아, 떨리네."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재중이형은 안가잖아. 너, 같이 놀 사람은 있어?"
 "뭐? 야, 심창민. 너 나 무시하냐? 나 친구 엄청 많아, 왜 이래?"


 내 말에 정윤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장난스런 미소를 짓는다. 원래대로 따지면 우리보다 한 살이 많은 정윤호다. 재중이형도 3학년이고 게다가 정윤호와 나는 반도 다르다. 맨 처음 정윤호가 학교에 복학 했을 때 집안 사람들은 걱정이 많았다. 타인에 대해 워낙 무관심한 정윤호인 탓에,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앞섰기 때문이였다. 게다가 무뚝뚝한 성격 때문에 살가움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정윤호다. 친구 사귀는데 문제가 많을 거라고 예상했던 우리였다.

 하지만 모든 것은 예상을 빗나갔다. 정윤호는 의외로 아이들과 잘지냈다. 그리고 원래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재중이형도 정윤호를 잘 챙겨주기도 했다. 점심 시간에 운동장에서 반 아이들과 농구를 하는 정윤호의 모습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정윤호에게 많이 신경을 써줬다. 하지만 더 이상 내가 없어도 반 아이들과 잘지내는 정윤호였다.


 "아, 떨린다."
 "뭐가?"
 "그냥. 수학 여행 가는거."
 "그게 뭐 특별한 거라구…."
 "그래도…. 난 수학 여행이란거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으니까."
 "……."
 "수학 여행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제대로 가본 소풍도 없는 것 같아."


 무심코 말했다가 불현듯 정윤호가 수학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내가 무의식적으로 낸 소리에 정윤호가 피식 웃는다. 바보 도 터지는 소리 하네. 정윤호와는 안어울리는 농담에 내가 웃자, 정윤호도 웃는다. 내가 장난스레 흘겨보자 정윤호가 활짝 웃었다. 정윤호의 웃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찌릿해왔다.

 나는 정윤호가 참 좋다. 이것 저것 따져서 좋은 것이 아니라, 그냥 좋다. 정윤호의 친절함도 좋고, 다정함도 좋다. 타인에게 무관심한 정윤호가 나에게는 이렇게 귀를 기울여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너무 좋다.

 회장님의 스케쥴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뀌는 아빠의 스케쥴 때문에, 나는 거의 아빠가 없이 자란 것이나 다름 없다. 아빠는 무척 바빴고, 내 주위에는 내 이야기를 깊이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정윤호는 한국에 없었고, 윤주는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남자와 여자라는 차이 때문에 깊은 이야기까지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박유천은….

 결코 박유천은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인간성을 가진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박유천은 생각보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곤 했다. 조금 툭툭 던지듯이 말하곤 했지만, 그래도 박유천은 항상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 뭐했냐, 오늘 어땠냐 같은 질문들. 내가 항상 박유천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해서 그렇지…. 생각해보면….


 "너도 알다시피 사실 나한테는 추억이라고 할만한 기억이 거의 없잖아."
 "……."
 "애들이랑 어디를 같이 가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뭐 야영 같은 것도 가본 적도 없고."
 "…그러네."
 "이번에 꼭 좋은 추억 만들어야지. 재미있겠다, 정말."


 그 말을 하며 정윤호가 나를 향해 빙긋 웃는다. 나도 정윤호를 향해 웃어주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며 세상사 관심 없는 듯 차가운 얼굴을 하고 쑥쓰러운 듯 저렇게 웃는 정윤호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또 안쓰럽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좋았던 기억이든 나빴던 기억이든 언젠가는 그 기억들이 먼 훗날이 되어서는 아련한 추억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되면, 사람은 그 아련한 추억을 조금씩 소비할 것이다. 그러면서 옛 기억을 다시금 추억하고…. 삶을 정리하겠지.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할 추억조차 없는 삶은 얼마나 쓸쓸할까.


 "창민아."
 "…응?"
 "…재미있겠지?"


 정윤호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묻는다. 이런 걸 보면 은근히 소심한 구석이 있는 정윤호다. 그런 소심한 모습이 웃겨 내가 피식 웃자 정윤호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인다. 정윤호의 검은 머리가 약한 바람에 슬쩍 흔들린다. 옅은 샴푸 냄새가 난다.


 "응. 정말로 재미있을 거야."


 정윤호가 좋다. 정윤호가 좋다. 이유는 없다. 그냥, 그냥 나는 정윤호가 좋다. 정윤호의 다정함도, 정윤호의 머쓱한 저 웃음도. 정윤호의 모든 것이 다 좋다. 정말로.



 *


 수학 여행 준비랍시고 사내 아이들 여러 명이 우르르 마트에 몰려갔다. 한 방을 쓰게 된 친구들끼리 밤새 먹을 과자들과 술을 사러 온 것이다. 만약 학주에게 걸린다면 뼈도 못추릴 일이지만, 그래도 수학 여행의 백미는 몰래 마시는 술. 형이 있는 애는 형의 주민등록증까지 빌려왔다. 다들 한번도 술을 마셔보지않은 사람들처럼 새삼스럽게 굴었다.

 얼마 전에 기범이와 기범이 여자 친구의 백일 파티 때 술을 진창 마셔 정윤호의 등에 업혀 집에 온 이후로는 술의 'ㅅ'만 들어도 몸에서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 그 다음 날 얼마나 호되게 속이 아팠는지 생각하면 아직고 진절머리가 난다. 나는 아이들이 잔뜩 담아놓은 술병을 아주 조심스럽게, 아무도 모르게 한 병씩 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러다 윤수에게 걸려 욕을 진창 얻어먹었다.


 "야! 술 너무 많이 사는 거 아냐? 과자 좀 사!"
 "3박 4일 동안 마실 술이거든? 한번만 더 빼봐, 너 죽는다?"


 윤수가 제 딴에는 가장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들어보인다. 내가 제자리에 갖다 놓았던 술병들을 다시 가지고 와서 카트에 담는 윤수를 흘겨봤다. 나 기범이 백일 날 진짜 죽을 뻔 했단 말이야. 우씨. 옆에서 내가 자꾸 투덜 투덜대자 윤수가 코웃음을 친다.


 "누가 주는 족족 그렇게 마시랬냐? 아, 아니지 나중에는 니가 병나발 불었잖아. 지가 그렇게 마셔놓고는 나보고 그래?"
 "내가 언제 병나발 불었어! 그런 적 없거든?"
 "오리발 내밀기는…. 너 진짜 완전 꽐라 되서, 너 집에 어떻게 데려다 주나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박유천이 전화 받아ㅅ…."


 나를 놀리는데 신이 난 건지 속사포 같이 말을 쏟아내던 윤수의 입에서 박유천의 이름이 나오자 마자 나도, 윤수도 둘 다 얼음이 되어버렸다. 박유천? 내 귀를 의심하며, 내가 천천히 윤수에게 되묻자, 윤수가 짜증을 내며 자신의 머리를 헝크렸다.

 분명히 그 날, 나를 업은 것은 정윤호였다. 아니, 당연히 정윤호라고 생각했는데….


 "아…. 박유천이 말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뭐야? 박유천이 왜?"
 "……."
 "야!"


 내 고함에 앞에서 장을 보고 있던 아이들이 나와 윤수를 돌아본다. 목소리 좀 낮춰. 윤수가 내게 중얼거리고는 앞에 있던 아이들에게 먼저 가고 있으라며 손짓을 했다. 자신의 머리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윤수의 손목을 붙잡았다.


 "박유천이라니?"
 "……."
 "야."


 윤수가 한숨을 푹 쉬고는 입을 연다. 나만 전혀 몰랐었던, 나 혼자만 전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던 나와 박유천의 뒷 이야기.


 "사실 박유천이 예전부터 나한테 신신당부 했었거든. 너 술 먹이지 말라고. 예전에 중학교 때 너 술 한 번 잘못 마시고 심하게 앓았다면서 혹시나 술자리 있을 때마다 너 못마시게 하라면서 나한테 부탁했었거든."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술 마셨을 때가 박유천의 모임에 따라갔을 때였다. 그때는 뭣도 모르고 처음으로 술을 마신다는 생각에 들떴을 때였다. 들뜬 나를, 박유천도 말리지는 않았었고 나는 주위 사람들이 채워주는 족족 마셨고 그 다음 날부터 거의 일주일 간 아파서 앓아 누웠었다. 처음 마시는 술에다 과음을 한 탓이였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 이후로 박유천은 내가 술을 마신다고 말할 때마다 반대를 했었다. 자신의 모임에는 반드시 데리고 가면서, 절대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고.


 "그 때, 기범이 녀석 100일 날에도, 박유천이 어떻게 알았는지 기범이네 집 가기 전에 나한테 와서 당부했었거든. 너 술 먹이지 말라고. 근데 그때 나도 정신 없고 그래서 너 못챙겼더니 너는 완전 뻗어버리고…. 결국 박유천한테 전화해서 너 데리러 온거고."
 "……."
 "나한테 별 말은 안했는데 그냥 너 업으면서 그러더라. 너한테 자기가 왔다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윤수가 말을 끝냈다. 동시에 엄청나게 커다란 망치로 누군가 내 머리를 세게 때린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항상 이런 식이다. 내가 관련되어 있는 일이면서, 정작 나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 화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이상한 기분이 자꾸 든다. 박유천이…, 박유천이 자꾸 생각난다.

 그 날이 떠오른다. 취기와 함께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 날의 밤. 나를 업은 채 집으로 향하던 든든한 등. 익숙한 향기. 그리고 따뜻한 등. 정윤호의 것이라고 착각했던 박유천의 등. 나를 업은 박유천에게 정윤호라고 불렀던 나.

 나를 자꾸 잔인한 사람으로 만드는 박유천. 미련한 박유천. 나 같은게 뭐가 예쁘다고, 나 같은게 뭐라고, 지가…, 그렇게 잘난 박유천이…. 왜 자꾸, 왜 자꾸 나를 미안하게…. 이렇게 마음이 아프게 만들어. 이 바보 같은 박유천아….

 참지 않으면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아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깨문 입술보다 마음이 더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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