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약속
아침을 먹기 위해서 본가로 건너갔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아주머니가 해준 아침밥을 먹었지만, 지금은 새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먹는다는 정도랄까? 내가 의자를 빼서 식탁에 앉자 새엄마가 환하게 웃으면서 내 앞으로 국과 밥을 갖다주었다. 이미 식탁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박유천을 제외한 정윤호, 윤주가 이미 와서 밥을 먹고 있었다. 박유천은 한참 후에 또 허겁지겁 내려오겠지. 오늘도 박유천과 함께 학교까지 뛰어갈 생각을 하자 눈앞이 캄캄해진다. 밥을 떠서 국과 함께 먹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박유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이예요.”
주방에 있는 모든 사람을 경악하게 만든 박유천의 이른 기상.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박유천의 놀라운 행동이다. 우리가 싸웠을 때는 그렇다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것은 박유천이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처음 이다. 샤워를 했는지 박유천에게서 시원한 샤워 코롱 향기가 났다. 거기다가 말끔하게 교복까지 갖춰 입고 있는 박유천을 보고 다들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거기다 저렇게 안 어울리는 다정한 멘트까지. 지금까지 먹었던 아침밥이 다 올라올 것 같은 기분이다. 박유천은 내 옆에 의자를 빼내어 앉더니 자신의 앞에 놓인 밥을 먹기 시작했다. 전부 다 경악한 얼굴로 박유천을 쳐다본다. 특히 윤주는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였다. 박유천은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열심히 밥을 먹는다.
“박유천."
“어? 왜?"
밥을 우물 우물 씹으면서 윤주를 쳐다본다. 윤주가 입을 벌린채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박유천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윤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말로 걱정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아마 윤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너, 뭐 죽을병 걸리거나 그런거 아니지?"
“엉?"
“사람은 죽기 전에 달라진다는데, 네가 갑자기 이러면 무서워지잖아."
정말로 진지하게 말하는 윤주를 한번 쳐다보더니 어이없다는 웃음을 짓는다. 나 멀쩡하거든? 유천의 말이 신뢰가 안가는지 윤주가 고개를 절래 젓는다. 믿든 안믿든 신경도 쓰지않은채 박유천은 계속 밥을 먹는다.
“잘 먹었습니다.”
정윤호가 밥을 반도 먹지 못했으면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이나 남은 밥그릇은 한쪽에 올려놓고 숟가락과 젓가락은 싱크대에 넣어놓는다. 그러고는 방으로 올라가버린다. 박유천은 그런 정윤호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밥을 먹는데 열중한다. 윤주도 다이어트를 하는지 밥을 반이나 남겨놓고는 2층으로 올라간다. 박유천은 밥을 열심히 먹었다. 그런 박유천이 하도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니까 박유천이 왜? 라며 묻는다.
“너무 신기해서.”
“뭐가?”
“나는 지금 네가 너무 신기하다. 오늘 무슨 날이냐?”
내 질문에 잠시 무표정한 얼굴을 짓던 박유천이 다시 얼굴을 풀고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다.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던 박유천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박유천의 탄식에 내가 박유천을 쳐다보자 박유천이 젓가락을 흔들거리며 말한다.
“오늘 우리 약속 있는 날이야. 영화 시사회 가는 날.”
“아…. 맞다. 오늘이지?”
“그것도 몰랐냐?”
“…참나, 지도 몰랐으면서.”
내 말에 박유천이 피식거리며 웃으면서 밥을 먹는다. 나 혼자만 몰랐으면 박유천한테 된통 욕을 얻어먹었을 텐데, 다행히 박유천도 약속을 기억 못했다. 오늘 일찍 마치는 날이니까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그렇게 집에 오면 되겠네. 내 말에 박유천이 고개를 끄덕인다.
“집에 들렀다가 가자. 옷 갈아입고.”
“심창민! 약속 잊으면 안 돼!”
집에 가서 가방을 가지러 오려고 부엌을 나서는데 박유천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뒤를 돌아보자 박유천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조금 애처로운 눈빛을 나에게 보내고 있었다. 박유천 답지 않은 행동에 웃음이 났다.
“알았어.”
“진짜 약속 잊으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진짜.”
내 확고한 대답도 미심쩍었는지 박유천은 밥을 먹다 달려와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 무슨 초딩같은 시추에이션이냐며 내가 타박을 했지만 박유천은 약속, 도장, 싸인, 복사, 코팅까지 완벽하게 해놓고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다. 박유천의 이런 행동에 그저 웃음만 날 뿐이었다.
*
“심창민. 너…, 박유천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
식당에서 김준수가 밥을 먹다말고 나에게 또 정말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박유천이 내 얼굴을 봤을 때부터 식당에서 밥을 먹는 내내 약속을 잊으면 안 된다며 옆에서 자꾸 중얼중얼거린 탓이였다. 박유천에게 전화가 와서 박유천이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뜨자마자 김준수가 나에게 물었다. 얼마나 묻고 싶었던걸 참았을까. 내가 귀찮은 표정으로 아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자 김준수가 그럼 왜? 라며 반문했다.
“오늘 저녁에 영화 보러 가기러 했었거든. 아! 그래 네가 준 표!”
“어? 무슨 표?”
김준수가 무슨 말이냐며 이해를 못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박유천이 분명히 그 시사회 표를 김준수가 줬다면서 그랬었는데? 얘가 기억을 못하는가. 김준수가 도통 이해를 못했다는 표정을 했다. 좀 더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았다.
“이번에 새로 나온 액션 영화 티켓! 시사회 표! 네가 박유천한테 줬다며!”
“…….”
“최시원 나오는 영화. 몰라?"
“…최시원?"
“그래. 박유천이 분명히 그랬는데? 네가 줬다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김준수가 한참 후에야 생각이 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그 표. 김준수가 이제야 알겠다며 싱긋 웃었다. 어이구, 김준수 바보. 그게 며칠 지났다고 까먹냐? 붕어 기억력. 내가 혀를 내밀며 놀리자 김준수가 썩소를 짓는다.
눈치 더럽게 없는 너한테 붕어 소리는 듣기 싫다. 김준수가 나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리듯 말한다. 김준수 얘는 이렇게 말할 때 무서워 죽겠다. 내가 입을 삐죽이는 것을 본 김준수가 한번 더 썩소를 짓는다. 내가 입을 올곧게 다물자 그제야 김준수가 피식 웃는다.
“아무튼 그 약속 까먹지 말라면서 아침부터 볼 때마다 저러잖아. 이제는 슬슬 짜증나려고 그런다.”
“네가 얼마나 신뢰가 안가면 박유천이 저러겠냐?”
“왜!!! 내가 얼마나 책임감 있고 신뢰감이 있는 남잔데!!”
“아이고…. 불쌍한 박유천….”
김준수가 장난스럽게 한숨을 내쉰다. 쳇, 가제는 게 편이라고 김준수는 항상 박유천의 편만 든다. 정작 박유천한테 맨날 당하는 건 난데! 나는 정말 억울하다. 박유천과 김준수와 함께 있으면 나는 항상 불리하다. 내 편은 아무도 없단 말이다. 흐엉.
“박유천, 참 지극하다. 지극정성이야.”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고개를 절래 저으며 비 맞은 듯 혼자 중얼거리던 김준수는 박유천이 돌아와서야 중얼거림을 멈췄다. 하지만 나를 거의 째려보듯 강렬하게 쳐다보는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흥, 붕어 기억력 김준수. 네가 노려보면 뭐 무서울 줄 아니?
*
「심창민, 잊지마.」
「약속 안 지키면 죽여버릴꺼야.」
「마치고 집에 먼저 가있어. 우리 조금 늦게 마친데.」
수업 시간 도중에 연달아 오는 문자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거기다 휴대폰 배터리도 없는 터라 그냥 휴대폰을 확 꺼버렸다. 최시원이 나오는 영화는 꼭 보고 싶다. 그래서 오늘 꼭 영화를 보러 갈건데 박유천은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는지 박유천은 이렇게도 많이 당부를 하는 걸까. 감히 이 심창민님을 믿지도 못하고. 쯧쯧. 이제 곧 수업이 마치니까 집에 가서 먼저 씻고 옷 갈아입고 기다리면 박유천이 오겠지?
수업을 마치고 빨리 집에 도착해서 씻고 대충 옷을 갈아입었다. 집에서 기다리려다가 박유천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본가에서 TV를 보면서 기다렸다. 다행히 회장님도 사모님도 안계셨다. 새엄마는 장을 보고 온다며 시장에 가셨따. 우리 반이 유난히 오늘따라 일찍 마치기는 했지만 삼 십분이 지나도록 박유천은 오지않았다. 나는 벌써 모든 준비를 끝냈는데. 박유천이 오면 늦게 왔다고 구박해야지. 혼자 소파에 앉아 재미없는 TV만 보면서 박유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집에 어울리는 커다란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박유천이 왔나 싶어 현관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정윤호가 서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지친 모습의 정윤호가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요즘 정윤호를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정윤호와 이야기도 많이 한 적도 없고. 박유천과 화해한 이후로는 거의 하루를 박유천과 함께 지내다 보니 정윤호에게 조금 무심해진 것 같아 미안해졌다.
“왔네.”
“…응.”
정윤호는 내 인사에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다시 정윤호와 어색해진 것 같아 괜히 신경이 쓰였다. 정윤호와의 사이가 괜찮아지면 박유천과 멀어지고, 또 박유천과의 사이가 다시 괜찮아지면 또 정윤호와 멀어지고. 아, 괜히 중간에 끼인 나만 불편하고 힘들다.
한참이 지난 후에 정윤호가 자신의 방에서 나와 거실로 내려왔다.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아무 무늬 없는 까만 정장을 입었다. 너무 까만 정장을 입어서 그런가? 유난히 오늘따라 정윤호의 얼굴이 창백해 보인다. 혹시나 아픈 게 아닌가 싶어 괜찮냐며 물었다.
“괜찮아? 얼굴이 좀 많이 안좋아보여.”
“…….”
내 질문에 답은 하지않고 한참을 나를 쳐다보던 정윤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창민아,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정윤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정말 창백했다. 정윤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보였다. 겨우 몸을 추스리고 일어난 병자 같았다.
“…어디?”
“…….”
아무 말이 없던 정윤호가 갑자기 나를 끌고 현관문을 나섰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대문 밖으로 끌려 나갔다. 정윤호가 골목을 지나가던 택시를 잡고 나를 태웠다. 윤호야! 소리를 지르는 나를 밀어넣고 자신도 내 옆에 탔다. 버스 터미널로 가주세요.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고는 정윤호가 문을 닫아버렸다.
“뭐하는 거야!”
“…….”
“뭐야! 정윤호!”
“오늘만… 같이 있어줘.”
“…….”
“오늘… 우리 엄마 기일인데… 그냥 네가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 창민아.”
정윤호가 아픈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한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매년 꼬박꼬박 챙겨왔던 사모님의 기일이였는데 어떻게 올해는 기억조차 못할 수가 있을까. 아무 말도, 정윤호에게 미안하다는 말 조차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 수 조차 없었다.
사모님은 내게 엄마 같은 존재셨고, 지금도 내게는 두번째 엄마다 다름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분의 기일을, 잊을 수가 있지?
지난 번에 함께 식사를 할 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나는 왜 이렇게 정윤호에게 상처만 주는 걸까. 정윤호를 가장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항상 내가 정윤호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정윤호가 오늘따라 힘들어한 이유를 이제야 알다니. 심창민, 바보.
“…미안.”
“괜찮아…, 대신에 오늘 하루만 같이 가줘.”
“…….”
“마음대로 끌고 와서 미안.”
자신에게 미안해야할 사람은 바로 나인데, 오히려 정윤호가 나에게 사과를 했다. 친어머니 같이 나를 대해주던 사모님의 기일을 잊어버린 난데…. 나는 차마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정윤호의 손을 잡았다.
“같이 가자.”
“…….”
“같이 가서 인사드리고 오자.”
동의의 뜻으로 정윤호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정윤호가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눈을 감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무언가가 크게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뭘까 곰곰이 생각했다. 무언가를 집에 놔두고 온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나는 박유천과의 약속을 잊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박유천이 집에 도착했을 텐데.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들떠있었던 박유천의 표정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 전원을 켰지만 배터리가 방전된 탓에 바로 다시 꺼지고 말았다. 정윤호에게 휴대폰이 있냐고 물었지만 고개를 절레 흔든다.
“안가지고 왔어. 기분 탓인가, 괜히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 근데 왜?”
“…유천이랑 저녁에 약속이 있었는데… 그냥 와버렸어.”
“……."
“……."
“…다시 돌아갈까? 약속이 있으면….”
미안한 듯 정윤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 그리고 나는 너무 큰 잘못을 했다. 나를 친어머니 처럼 돌봐주신 사모님의 기일을 잊어버리다니. 만약 내가 다시 박유천에게 돌아간다면 나는 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정윤호도 다시는 마음 편히 볼 수 없을 것 같다.
“가자…. 인사드리러.”
정윤호의 손을 잡았다. 정윤호가 엹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기댔다. 그리고 박유천이 이런 나를 제발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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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기 위해서 본가로 건너갔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아주머니가 해준 아침밥을 먹었지만, 지금은 새엄마가 해주는 음식을 먹는다는 정도랄까? 내가 의자를 빼서 식탁에 앉자 새엄마가 환하게 웃으면서 내 앞으로 국과 밥을 갖다주었다. 이미 식탁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박유천을 제외한 정윤호, 윤주가 이미 와서 밥을 먹고 있었다. 박유천은 한참 후에 또 허겁지겁 내려오겠지. 오늘도 박유천과 함께 학교까지 뛰어갈 생각을 하자 눈앞이 캄캄해진다. 밥을 떠서 국과 함께 먹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박유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이예요.”
주방에 있는 모든 사람을 경악하게 만든 박유천의 이른 기상.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박유천의 놀라운 행동이다. 우리가 싸웠을 때는 그렇다쳐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것은 박유천이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처음 이다. 샤워를 했는지 박유천에게서 시원한 샤워 코롱 향기가 났다. 거기다가 말끔하게 교복까지 갖춰 입고 있는 박유천을 보고 다들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거기다 저렇게 안 어울리는 다정한 멘트까지. 지금까지 먹었던 아침밥이 다 올라올 것 같은 기분이다. 박유천은 내 옆에 의자를 빼내어 앉더니 자신의 앞에 놓인 밥을 먹기 시작했다. 전부 다 경악한 얼굴로 박유천을 쳐다본다. 특히 윤주는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였다. 박유천은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열심히 밥을 먹는다.
“박유천."
“어? 왜?"
밥을 우물 우물 씹으면서 윤주를 쳐다본다. 윤주가 입을 벌린채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박유천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윤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말로 걱정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아마 윤주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너, 뭐 죽을병 걸리거나 그런거 아니지?"
“엉?"
“사람은 죽기 전에 달라진다는데, 네가 갑자기 이러면 무서워지잖아."
정말로 진지하게 말하는 윤주를 한번 쳐다보더니 어이없다는 웃음을 짓는다. 나 멀쩡하거든? 유천의 말이 신뢰가 안가는지 윤주가 고개를 절래 젓는다. 믿든 안믿든 신경도 쓰지않은채 박유천은 계속 밥을 먹는다.
“잘 먹었습니다.”
정윤호가 밥을 반도 먹지 못했으면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이나 남은 밥그릇은 한쪽에 올려놓고 숟가락과 젓가락은 싱크대에 넣어놓는다. 그러고는 방으로 올라가버린다. 박유천은 그런 정윤호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밥을 먹는데 열중한다. 윤주도 다이어트를 하는지 밥을 반이나 남겨놓고는 2층으로 올라간다. 박유천은 밥을 열심히 먹었다. 그런 박유천이 하도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니까 박유천이 왜? 라며 묻는다.
“너무 신기해서.”
“뭐가?”
“나는 지금 네가 너무 신기하다. 오늘 무슨 날이냐?”
내 질문에 잠시 무표정한 얼굴을 짓던 박유천이 다시 얼굴을 풀고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다.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던 박유천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박유천의 탄식에 내가 박유천을 쳐다보자 박유천이 젓가락을 흔들거리며 말한다.
“오늘 우리 약속 있는 날이야. 영화 시사회 가는 날.”
“아…. 맞다. 오늘이지?”
“그것도 몰랐냐?”
“…참나, 지도 몰랐으면서.”
내 말에 박유천이 피식거리며 웃으면서 밥을 먹는다. 나 혼자만 몰랐으면 박유천한테 된통 욕을 얻어먹었을 텐데, 다행히 박유천도 약속을 기억 못했다. 오늘 일찍 마치는 날이니까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그렇게 집에 오면 되겠네. 내 말에 박유천이 고개를 끄덕인다.
“집에 들렀다가 가자. 옷 갈아입고.”
“심창민! 약속 잊으면 안 돼!”
집에 가서 가방을 가지러 오려고 부엌을 나서는데 박유천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뒤를 돌아보자 박유천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조금 애처로운 눈빛을 나에게 보내고 있었다. 박유천 답지 않은 행동에 웃음이 났다.
“알았어.”
“진짜 약속 잊으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진짜.”
내 확고한 대답도 미심쩍었는지 박유천은 밥을 먹다 달려와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이 무슨 초딩같은 시추에이션이냐며 내가 타박을 했지만 박유천은 약속, 도장, 싸인, 복사, 코팅까지 완벽하게 해놓고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다. 박유천의 이런 행동에 그저 웃음만 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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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창민. 너…, 박유천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
식당에서 김준수가 밥을 먹다말고 나에게 또 정말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박유천이 내 얼굴을 봤을 때부터 식당에서 밥을 먹는 내내 약속을 잊으면 안 된다며 옆에서 자꾸 중얼중얼거린 탓이였다. 박유천에게 전화가 와서 박유천이 전화를 받는다며 자리를 뜨자마자 김준수가 나에게 물었다. 얼마나 묻고 싶었던걸 참았을까. 내가 귀찮은 표정으로 아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자 김준수가 그럼 왜? 라며 반문했다.
“오늘 저녁에 영화 보러 가기러 했었거든. 아! 그래 네가 준 표!”
“어? 무슨 표?”
김준수가 무슨 말이냐며 이해를 못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박유천이 분명히 그 시사회 표를 김준수가 줬다면서 그랬었는데? 얘가 기억을 못하는가. 김준수가 도통 이해를 못했다는 표정을 했다. 좀 더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았다.
“이번에 새로 나온 액션 영화 티켓! 시사회 표! 네가 박유천한테 줬다며!”
“…….”
“최시원 나오는 영화. 몰라?"
“…최시원?"
“그래. 박유천이 분명히 그랬는데? 네가 줬다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 김준수가 한참 후에야 생각이 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그 표. 김준수가 이제야 알겠다며 싱긋 웃었다. 어이구, 김준수 바보. 그게 며칠 지났다고 까먹냐? 붕어 기억력. 내가 혀를 내밀며 놀리자 김준수가 썩소를 짓는다.
눈치 더럽게 없는 너한테 붕어 소리는 듣기 싫다. 김준수가 나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리듯 말한다. 김준수 얘는 이렇게 말할 때 무서워 죽겠다. 내가 입을 삐죽이는 것을 본 김준수가 한번 더 썩소를 짓는다. 내가 입을 올곧게 다물자 그제야 김준수가 피식 웃는다.
“아무튼 그 약속 까먹지 말라면서 아침부터 볼 때마다 저러잖아. 이제는 슬슬 짜증나려고 그런다.”
“네가 얼마나 신뢰가 안가면 박유천이 저러겠냐?”
“왜!!! 내가 얼마나 책임감 있고 신뢰감이 있는 남잔데!!”
“아이고…. 불쌍한 박유천….”
김준수가 장난스럽게 한숨을 내쉰다. 쳇, 가제는 게 편이라고 김준수는 항상 박유천의 편만 든다. 정작 박유천한테 맨날 당하는 건 난데! 나는 정말 억울하다. 박유천과 김준수와 함께 있으면 나는 항상 불리하다. 내 편은 아무도 없단 말이다. 흐엉.
“박유천, 참 지극하다. 지극정성이야.”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고개를 절래 저으며 비 맞은 듯 혼자 중얼거리던 김준수는 박유천이 돌아와서야 중얼거림을 멈췄다. 하지만 나를 거의 째려보듯 강렬하게 쳐다보는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흥, 붕어 기억력 김준수. 네가 노려보면 뭐 무서울 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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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창민, 잊지마.」
「약속 안 지키면 죽여버릴꺼야.」
「마치고 집에 먼저 가있어. 우리 조금 늦게 마친데.」
수업 시간 도중에 연달아 오는 문자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거기다 휴대폰 배터리도 없는 터라 그냥 휴대폰을 확 꺼버렸다. 최시원이 나오는 영화는 꼭 보고 싶다. 그래서 오늘 꼭 영화를 보러 갈건데 박유천은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는지 박유천은 이렇게도 많이 당부를 하는 걸까. 감히 이 심창민님을 믿지도 못하고. 쯧쯧. 이제 곧 수업이 마치니까 집에 가서 먼저 씻고 옷 갈아입고 기다리면 박유천이 오겠지?
수업을 마치고 빨리 집에 도착해서 씻고 대충 옷을 갈아입었다. 집에서 기다리려다가 박유천을 바로 볼 수 있도록 본가에서 TV를 보면서 기다렸다. 다행히 회장님도 사모님도 안계셨다. 새엄마는 장을 보고 온다며 시장에 가셨따. 우리 반이 유난히 오늘따라 일찍 마치기는 했지만 삼 십분이 지나도록 박유천은 오지않았다. 나는 벌써 모든 준비를 끝냈는데. 박유천이 오면 늦게 왔다고 구박해야지. 혼자 소파에 앉아 재미없는 TV만 보면서 박유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집에 어울리는 커다란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박유천이 왔나 싶어 현관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정윤호가 서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지친 모습의 정윤호가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요즘 정윤호를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정윤호와 이야기도 많이 한 적도 없고. 박유천과 화해한 이후로는 거의 하루를 박유천과 함께 지내다 보니 정윤호에게 조금 무심해진 것 같아 미안해졌다.
“왔네.”
“…응.”
정윤호는 내 인사에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다시 정윤호와 어색해진 것 같아 괜히 신경이 쓰였다. 정윤호와의 사이가 괜찮아지면 박유천과 멀어지고, 또 박유천과의 사이가 다시 괜찮아지면 또 정윤호와 멀어지고. 아, 괜히 중간에 끼인 나만 불편하고 힘들다.
한참이 지난 후에 정윤호가 자신의 방에서 나와 거실로 내려왔다. 머리를 단정하게 하고, 아무 무늬 없는 까만 정장을 입었다. 너무 까만 정장을 입어서 그런가? 유난히 오늘따라 정윤호의 얼굴이 창백해 보인다. 혹시나 아픈 게 아닌가 싶어 괜찮냐며 물었다.
“괜찮아? 얼굴이 좀 많이 안좋아보여.”
“…….”
내 질문에 답은 하지않고 한참을 나를 쳐다보던 정윤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창민아,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정윤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정말 창백했다. 정윤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보였다. 겨우 몸을 추스리고 일어난 병자 같았다.
“…어디?”
“…….”
아무 말이 없던 정윤호가 갑자기 나를 끌고 현관문을 나섰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대문 밖으로 끌려 나갔다. 정윤호가 골목을 지나가던 택시를 잡고 나를 태웠다. 윤호야! 소리를 지르는 나를 밀어넣고 자신도 내 옆에 탔다. 버스 터미널로 가주세요.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고는 정윤호가 문을 닫아버렸다.
“뭐하는 거야!”
“…….”
“뭐야! 정윤호!”
“오늘만… 같이 있어줘.”
“…….”
“오늘… 우리 엄마 기일인데… 그냥 네가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 창민아.”
정윤호가 아픈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한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매년 꼬박꼬박 챙겨왔던 사모님의 기일이였는데 어떻게 올해는 기억조차 못할 수가 있을까. 아무 말도, 정윤호에게 미안하다는 말 조차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 수 조차 없었다.
사모님은 내게 엄마 같은 존재셨고, 지금도 내게는 두번째 엄마다 다름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분의 기일을, 잊을 수가 있지?
지난 번에 함께 식사를 할 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나는 왜 이렇게 정윤호에게 상처만 주는 걸까. 정윤호를 가장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항상 내가 정윤호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정윤호가 오늘따라 힘들어한 이유를 이제야 알다니. 심창민, 바보.
“…미안.”
“괜찮아…, 대신에 오늘 하루만 같이 가줘.”
“…….”
“마음대로 끌고 와서 미안.”
자신에게 미안해야할 사람은 바로 나인데, 오히려 정윤호가 나에게 사과를 했다. 친어머니 같이 나를 대해주던 사모님의 기일을 잊어버린 난데…. 나는 차마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정윤호의 손을 잡았다.
“같이 가자.”
“…….”
“같이 가서 인사드리고 오자.”
동의의 뜻으로 정윤호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정윤호가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눈을 감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무언가가 크게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뭘까 곰곰이 생각했다. 무언가를 집에 놔두고 온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나는 박유천과의 약속을 잊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박유천이 집에 도착했을 텐데.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들떠있었던 박유천의 표정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 전원을 켰지만 배터리가 방전된 탓에 바로 다시 꺼지고 말았다. 정윤호에게 휴대폰이 있냐고 물었지만 고개를 절레 흔든다.
“안가지고 왔어. 기분 탓인가, 괜히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 근데 왜?”
“…유천이랑 저녁에 약속이 있었는데… 그냥 와버렸어.”
“……."
“……."
“…다시 돌아갈까? 약속이 있으면….”
미안한 듯 정윤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 그리고 나는 너무 큰 잘못을 했다. 나를 친어머니 처럼 돌봐주신 사모님의 기일을 잊어버리다니. 만약 내가 다시 박유천에게 돌아간다면 나는 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정윤호도 다시는 마음 편히 볼 수 없을 것 같다.
“가자…. 인사드리러.”
정윤호의 손을 잡았다. 정윤호가 엹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기댔다. 그리고 박유천이 이런 나를 제발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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