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에게 고함 6 by 개꽃

6. 희망고문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제 슬슬 해가 길어지고 있다. 저녁 7시인데도 해가 아직 지지 않았다. 주황빛의 태양이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오늘 내가 야자를 안 한다고 하자 박유천도 덩달아 야자를 빠졌다. 빠질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박유천은 굳이 나와 함께 가야겠다며 수업이 마치자마자 교실을 뛰쳐나와 우리반 앞에 서있었다. 결국 박유천과 나는 지금 이렇게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

 박유천과 함께 가는 것이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다. 다만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예전에는 그냥 사소한 이야기를 하거나 아니면 박유천이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일’ 이후로는 박유천의 말수가 급격하게 줄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다고 내가 말이 많은 편도 아니고. 요즘 박유천과 함께 걸으면 말없이 걷는 일이 다반사다.

 지금도 박유천은 아무 말이 없다. 이 침묵이 민망해서 괜히 박유천을 힐끗 쳐다봤다. 박유천은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보며 그냥 걷기만 했다. 문득 박유천의 까만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박유천의 머리는 상당히 빨리 자라는 편이다. 머리를 자른지 얼마 안 지났는데 금세 머리가 박유천의 목덜미를 덮었다. 손을 뻗어 박유천의 뒷머리를 만졌다.


 “야, 너 머리 진짜 많이 길었다.”
 “아, 그래?”
 “넌 무슨 머리가 이렇게 빨리 기냐. 맨날 야한 생각만 하는거 아냐?”


 어설프게 던진 내 농담에 박유천이 킥킥댔다. 박유천이 나를 보며 웃었다. 박유천의 하얀 목이 눈에 띄었다. 박유천의 목이 뭐 특별히 가늘거나 그렇지는 않은데 와이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놔서 그런가, 목이 휑한 게 조금 거슬렸다. 뭔가 목걸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너, 금요일에 약속 있냐?”


 박유천의 목을 보며 어떤 목걸이가 어울릴까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박유천이 상당히 가벼운 어조로 나에게 물었다. 주중에는 딱히 약속을 잡지 않는다. 아무 약속 없다는 내 말에 박유천이 영화나 보러가자며 가방에서 영화표를 꺼냈다.


 “준수가 주더라. 새로 나온 영화푠데 공짜로 받았다고. 시사회 표래.”
 “아, 그래? 뭔데?”
 “액션 영화라는데? 요새 새로 나온 영화라던데….”
 “정말? 설마 최시원 나오는거야?"
 “최시원? 아…. 아마 그럴껄?"


 액션 영화라는 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거기다가 요즘에 내가 좋아하는 영화 배우 최시원이 나오는 영화라니! 거기다가 직접 최시원을 볼 수 있는 시사회 표라니! 나는 배우 최시원을 좋아한다. 아, 그렇게 좋아하는게 아니라 정말 팬과 배우로써. 최시원을 보고 있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최시원이 그렇게 좋냐? 여자도 아니고…. 무슨 남자 배우를 좋아하냐?"
 “야, 최시원 진-짜 멋있어. 성격도 완전 착해."
 “심창민, 네가 최시원 친구냐? 알지도 못하면서 성격은 어떻게 알어?"
 “척하면 척이야."


 내 말에 박유천이 웃긴다는 듯 콧방귀를 뀐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액션 영화만 골라서 본다. 영화에 나오는 액션을 보고 있으면 심장이 쿵쿵거리며 뛴다. 남자들만의 세계의 힘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내가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반면에 박유천은 답지 않게 멜로 영화를 좋아한다. 울고 짜고 뻔 한 스토리의 멜로 영화. 나랑 영화를 보러갈 때마다 항상 박유천은 내가 싫다는데도 끝까지 멜로 영화를 고집했다. 결국 멜로 영화를 보러가서 나는 영화 러닝 타임 내내 잠을 자고, 박유천은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근데 너 액션 영화 싫어하잖아?”
 “뭐, 공짜푠데 어때. 가끔씩 액션 영화 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 괜찮지?”
 “어, 뭐…. 금요일이라고?”
 “어…. 평일인 게 조금 거슬리긴 한데 그래도 뭐, 금요일 밤이라서. 갈 거지?”


 당연하지! 내가 고개를 세게 끄덕이자 박유천이 나를 보고 피식 웃는다. 그럼 영화보고 저녁 먹고 들어가자. 박유천이 자신이 저녁을 사주겠다고 했다. 짠돌이 박유천이 저녁을 사준다니! 이런 좋은 기회를 내가 왜 마다하겠는가? 박유천의 말에 세상이 온통 행복해보였다.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너무 씩씩하게 걸었는지 걷다가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에 걸려 몸이 기우뚱거렸다.


 “어, 어, 어….”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고 삐끗거렸는데, 박유천이 손을 뻗어 넘어지지 않도록 내 팔을 꽉 움켜잡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몰랐는데 정신을 차리니 박유천이 엄청난 악력으로 내 팔을 붙들고 있었다. 박유천이 잡은 팔이 아파왔다. 야, 아파. 삐끗한 발목보다 박유천이 잡고 있는 팔이 더 아팠다. 박유천은 내 팔을 놓지 않고 계속 잡고 있었다.


 “박유천, 팔 아파.”
 “아… 미안. 괜찮아?”


 나의 아프다는 말에 흠칫 놀라며 박유천이 내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나는 길을 걷다가 자주 삐끗거리거나 넘어진다. 그런 나를 보고 박유천이 예전에 허우대만 멀쩡한 놈이라며 놀린 적이 있었다. 솔직히 그건 나도 인정한다. 하체에 힘이 없는 건지 걷다가 종종 혼자 넘어지거나 삐끗거린다. 남자는 하체가 부실하면 안 된다던데, 큰일이다.

 박유천이 계속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본다. 발목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고개를 들었는데 박유천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는 것이 좀 부담스러웠다. 괜찮아. 툭툭. 박유천의 어깨를 툭 치며 앞서 나갔다. 그냥, 박유천의 그런 표정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예전 같았으면 박유천의 그런 표정이 신기했을 텐데, 지금은 마냥 신기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좀, 그렇다.


 “괜찮아?"
 “어. 그냥 잠깐 기우뚱한거야."
 “조심 좀 해. 다치면 어떡할려고 그래?"


 내가 기우뚱거리면서 떨어뜨린 내 휴대폰을 박유천이 주워준다. 배터리 끼우는 부분에 자신이 붙여놓았던 스티커 사진을 보더니 웃는다. 역시나, 찐빵 같애. 박유천의 웃음에 괜히 빈정이 상했다. 박유천이 들고 있던 내 휴대폰을 잽싸게 뺏었다.


 “그래도 스티커 안뗐네?"
 “오늘 뗄꺼다! 흥."


 사실 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누가 휴대폰 뒷면을 자세히 보는 것도 아니고 괜히 뗐다가 자국이 남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떼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박유천이 웃는 모습을 보자 괜히 배알이 꼴려 오늘 뗄거라고 큰 소리를 쳤다.


 “아서라. 붙여놔. 귀엽기만 하구만. 찐빵창민."
 “됐거든? 나 집에 가서 당장 뗄거다."


 박유천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먼저 걸어간다. 오늘 뗄거라며 씩씩 대는 내게 아무 말 없이 그저 웃는다. 좀 이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사소한 말에 말꼬리를 잡아서는 말싸움을 했을 텐데 저렇게 사람 좋은 미소만 짓고 있다니. 아무래도 박유천이 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사람이 죽기 전에는 달라진다던데…. 박유천이 죽으려고 하나? 왜 저러지?



 *


 오늘도 역시 박유천과 김준수,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 점심을 먹으러 왔지만 박유천이 반에 일이 있다면서 급식을 받자마자 초스피드로 밥을 먹고 올라갔다. 나와 김준수는 둘이 남아 마주보고 밥을 먹었다.


 “김준수."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도저히 집중해서 밥을 못먹겠다. 밥을 먹는 내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김준수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을 식판에 내려놓고 김준수를 쳐다봤다. 김준수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니. 아무 것도 안묻었어."
 “근데 왜 자꾸 쳐다봐?"


 내 말에 김준수도 들고 있던 숟가락을 식판에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놓는다. 그러더니 팔짱을 낀 채로 나에게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


 “심창민. 너, 희망고문이 뭔지 알아?”


 희망고문? 희망고문이 뭐지? 물고문도 아니고, 희한한 고문이네. 내가 킥킥대며 웃자 김준수가 나를 한심한 듯 쳐다보면서 말했다.


 “야, 넌 파리의 연인도 안 봤니?”
 “한국 드라마는 맨날 울고 짜서 안 봐. 뻔한 스토리에 뻔한 결말인데 보면 뭐해?”
 “역시 정서가 메마른 놈이야, 넌."
 “김준수 너 보다는 낫거든?"


 메마른 놈. 눈치도 더럽게 없으면서 감정까지 메말랐으니. 설상가상이네. 그냥 나가 죽어라. 김준수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젓더니 혀를 쯧쯧 찬다. 흥, 기가 막히네. 누가 누구보고 감정이 메말랐데?


 “아무튼, 파리의 연인에서 김정은이 이동건보고 말 한 대사 중에 나와. 희망고문이라고.”
 “희망고문. 그래 그게 뭔데?”


 김준수가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김준수의 진지한 표정이 몹시 낯설고 웃기다. 내가 아는 김준수는 항상 장난기 어려있는 얼굴에 잘 웃는 사람이다. 김준수는 싱글벙글한 얼굴이 더 잘 어울리는데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한 김준수를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어색해서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다. 희망고문이 뭐냐는 내 대답에 잠시 고민을 하던 김준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희망고문이 뭐냐면,”
 “응.”
 “만약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할 수가 없다면, 나를 좋아해주는 그 사람에게 작은 희망도 주지 말아야한다는 거야. 내가 그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조차 그 사람에게는 고문이 될 수 있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는데 정말로 로맨스, 사랑 뭐 이런 분야에는 내 감정이 메마른 게 분명하다. 김준수의 설명이 이해가 잘 안 된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고, 그 사람에게 희망을 주지 말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이래?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무슨 고문을 하고 그래?


 “…그래. 더 쉬운 예를 들어줄게.”
 “그래-.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다.”


 예를 들어주겠다는 김준수의 목소리가 아까와는 다르게 착 가라앉아있었다. 내가 혹시 무슨 말실수를 한건 아닌가 싶어서 괜히 김준수의 눈치를 봤다. 약간 고민을 하는 듯한 김준수다. 잠시 가만히 있던 김준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서, 심창민 너를, 박유천이 좋아해.”
 “야- 말이 되는 예를 들어야지. 말도 안되는 소리 하고 있어.”
 “어차피 예를 들어서 말하는 건데 뭐. 진짜도 아니고.”
 “…뭐, 그렇긴 하지만."


 사실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말하는 김준수가 무서웠다. 박유천이 나를 좋아한다는 망측한 ‘만약’이 상당히 기분이 나빴지만 김준수의 얼굴을 보면 차마 싫다는 소리를 못하겠다. 그 정도로 김준수의 얼굴이 굳어있었다.


 “그런데 너는 박유천이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해.”
 “…….”
 “근데 넌 박유천에게 상당히 잘 대해줘.”
 “…….”
 “그럼 박유천은 또 착각을 하겠지? 심창민이 자신에게 잘 대해주니까. ‘혹시’라는 마음이 생기겠지. 그러면서 박유천은 여전히 심창민을 좋아할 거야. 왜냐면 희망이 있잖아. 심창민이 자신을 좋아할 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러다가 또 박유천은 상처를 받겠지. 사실 심창민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게 희망고문이야.”
 “…좀 당황스러운 ‘예’지만 이해 효과는 확실하네.”


 김준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애써 웃음을 지었다. 바람직한 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해 효과에는 참 탁월한 효과가 있는 예라고 생각하면서. 김준수의 초이스 센스에 헛웃음이 나왔다. 아우, 생각만해도 소름끼치는 ‘예’다. 장난스럽게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떠는 시늉을 했다. 김준수가 나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까지 지켜본 심창민은 참 착한데,”
 “…어?”
 “그런 면에서는 너, 참 못됐다. 정말.”


 말을 끝낸 김준수가 갑자기 요란하게 식판을 챙기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먼저 갈게. 천천히 먹고 올라와. 쌩하고 찬바람을 일으키고 가버리는 김준수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정말 몹시 당황스러운 상황이다. 내가 김준수에게 뭔가 잘못한게 있나? 곰곰히 생각해봐도 전혀 그런 건 없다. 김준수가 저렇게 화난 이유가 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직 반이나 넘게 남은 밥을 조금씩 떠서 입에 넣었다. 김준수는 또 왜 저래. 괜히 또 짜증이 밀려왔다. 밥알을 씹는게 아니라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다. 결국 나도 식판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배는 많이 고팠지만, 잔반들을 다 버리고 교실로 올라갔다.



 *


 오늘도 역시나 박유천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늘도 수업 종이 치자마자 우리 반 앞으로 달려온 박유천과 함께 나란히 학교 정문을 나섰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 손님이 와있었다. 학교 정문 옆에 다른 학교 여학생들의 무리가 우르르 서있었다. 한 열 명정도 되어 보이는 무리가 정문을 나서는 우리 학교 학생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남녀공학인 우리 학교지만 같은 학교 여자애들은 여자로 보지않는 우리 학교 남자애들이라, 다른 학교 여학생을 보고 다들 좋아한다. 남학생들은 거의 다 정문을 지나가면서 그 여학생 무리를 힐끔 쳐다보고 지나간다. 여자아이들은 쟤네 뭐냐면서 욕을 하고.

 난 그런 것에 관심은 없지만, 평소에 없던 거라 그냥 한번 시선을 두었다. 여고생 무리를 한번 쓱 쳐다보고 지나가려는데, 그 무리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더니 여자애들이 자신의 무리 중 한 명의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등을 떠밀린 여자애가 쭈뼛거리며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걸 본 우리 학교 학생들이 더 난리가 났다.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데 어찌나 세게 지르는지 귀가 터질 것같았다.


 “저, 저기요….”
 “…네? 저요?”
 “네…. 예전에 한번 보고 반해서 그러는데요…. 휴대폰 번호 좀 가르쳐주세요….”
 “네…?”


 심창민 생애 18년 만에 처음으로 여자에게 사적으로 번호를 가르쳐주는 순간인가!!! 사실 조금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뭐랄까, 썩 내키는 일은 아니였다. 나를 보수적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가벼운 만남은 싫어한다. 적어도 사랑한다고 말할 정도의 사이라면 책임감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주위의 친구들을 보면 대부분 일회성 만남으로 만나는 것 같다. 이렇게 번호를 따고, 헌팅을 하거나 당하는 것 모두가 가벼운 만남이 아닐까? 물론 그 만남이 지속된다면 상관이 없지만. 썩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내 앞에서 휴대폰을 내미는 여자애의 조그만 얼굴을 보자 차마 싫다고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여자애가 건내주는 휴대폰으로 손을 뻗으려는데….


 “야! 박유천.”
 “저기요. 얘보다는 제가 좀 더 잘생겼거든요? 그냥 제 번호 따가세요.”


 갑자기 내 옆에 서있던 박유천이 자신이 그 여자애의 휴대폰을 가져가더니 꾹꾹-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누른다. 뭐, 이런 당황스러운 놈이 다 있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나도, 그 여자애도, 그 여자애의 무리도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순식간에 자신의 11자리 번호를 다 누른 박유천이 통화 버튼을 누른 후, 벨소리가 울리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여자애에게 보여준다. 그리고는 벙찐 표정의 여자애에게 휴대폰을 다시 돌려준다. 뒤에 서있던 여자애의 무리는 이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소리를 지르고 지금 난리가 났다. 잘생긴 박유천이 자진해서 번호를 가르쳐줬다는 사실에 흥분을 한 것 같았다. 뭐, 우리 학교 학생들도 소리 지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 됐죠? 저희 갑니다. 저희는 갈 길이 멀어서, 이만.”


 심창민, 가자. 내 팔을 끌어당기는 박유천이 우리를 우르르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을 뚫고 지나갔다. 뒤에서는 여전히 시끄러운 환호 소리가 들렸다. 잘생기지만 않았어도 전따를 당했을, 그 재수 없다는 싸가지 박유천이 자진해서 자신의 번호를 줬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놀란 것이 분명하다. 사실 나도 많이 놀랬다.


 “뭐냐, 너?”


 뭐, 아까 그 여자애에게 번호를 주지못해서 아쉽다기보다는 박유천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다.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였지만 내 질문에 박유천이 아무 말이 없이 걷기만 하자 괜시리 골려주고 싶었다. 박유천의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을 뺏었다.


 “나도 그 여자애 번호 가르쳐줘!”
 “왜?”
 “원래 내 꺼잖아.”
 “웃긴다. 내가 땄음 내 꺼지.”


 그러고는 다시 휴대폰을 가져가버린다. 박유천의 주위에 번호를 준다는 여자애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가 아까 그 여자애는 박유천의 이상형과는 전혀 맞지않는 -박유천의 이상형은 몸매가 좋고 여성스럽고 털털한데다가 애교가 많아야하고, 머릿결이 좋고 청순하고 섹시해야하며 목선이 예쁘고 춤까지 잘 추는 여자이다. 그런데 어떻게 청순한 여자가 섹시할 수 있지?- 키가 작고 아담한 사이즈의 여자애였다. 평소의 박유천이라면 거들떠도 안봤을 취향의 여자애였는데 왜 박유천이 번호를 줬을까?

 며칠 전에도 박유천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일이 겪고 보니까 정말 확실해졌다. 박유천은 정말 달라진 것 같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정말 박유천이 죽으려고 하는 건가?


 “너 정말 걔한테 번호 왜 줬어?”
 “…니가 알아서 뭐하게.”
 “그냥. 니 취향이 아닌 거 같던데 번호를 주니까 신기해서 그러지!”
 “몰라도 돼.”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도 내가 계속 꼬치꼬치 캐물어도 박유천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박유천이 입을 연 건 버스가 도착해서 우리의 주위가 몹시 소란스러워졌을 때였다. 내가 버스에 올라타고 박유천이 내 뒤에 서있을 때 박유천이 작게 중얼거렸다. 정확히는 알아 듣지 못했는데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사실은 잘못 들은 것 같다.


 “정윤호 하나도 신경쓰여 죽겠는데 여자는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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